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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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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u Students Independence Movement

광주학생독립운동, 어디까지 알고 있니?

전개과정

1919년 3·1운동 이후 학생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점차 독립운동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해 갔으며, 비조직적인 학생운동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변화하였고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침체했던 민족운동에 화기를 불어넣었다.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인 왕재일과 장재성 등은 항일 학생 비밀 결사 ‘성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유학을 마친 장재성은 성진회를 계승한 독서회 중앙본부를 결성하였으며, 광주농업학교와 광주사범학교는 독서회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는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성진회[성진회 결성 기념사진]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호남선 통학열차 안에서 일본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인 박기옥과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하며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으며, 파견된 일본인 경찰의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구타와 일본인 기자의 편파적인 비난으로 조선인 학생들은 분노하였다. 이 충돌은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나주역, 박준채와 박기옥, 이광춘[나주역][박준채와 박기옥, 이광춘]

1929년 11월 3일은 음력으로 개천절이며, 성진회 창설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이 겹치는 일요일이었다. 일제는 일요일임에도 명치절을 맞아 조선인 학생들을 등교시켜 신사참배를 요구했으나 조선인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기념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중학 학생들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학생들이 한국 학생 최쌍현을 단도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산발적인 싸움이 아닌 학교간의 전면적인 패싸움으로 확대되었으며,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투쟁을 할 것을 논의하였다. 조선인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행진가, 응원가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하며 시위를 진행하였다. 시위는 학생만이 아닌 광주 시민까지 합류한 거대한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 날의 시위에 일본 경찰은 한국 학생 75명을 체포했지만, 일본 학생들은 10명 정도만 잡아가는 시늉을 보였으며, 11월 9일까지 임시 휴교 처분을 내렸다. 또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이 일이 전국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학생 운동의 철저한 탄압을 각지의 학교장들에게 지시하였다.

학생들 시위 사진[학생들 시위 모습]

11월 10일, 다시 등교하게 된 광주고보 학생들은 잡혀간 학생들의 자리를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잡혀간 학생들을 석방하게 하기 위한 2차 시위를 결정하고 학생들의 석방, 식민지 교육 폐지, 교내의 경찰관 침입 금지,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 보장등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제작하여 광주 장날인 11월 12일 독서회의 주도로 학생들과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서는 광주고보학생 300여명, 광주농업학교 학생 100여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은 전부 무기 정학, 학교는 무기한 휴교를 단행했으며, 이 일을 신문에 싣지 못하게 언론을 탄압하였다. 신간회의 도움과 보도탄압의 해제로 전국의 학생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목포상업학교, 정명학교, 나주고등보통학교 등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30년 3월까지 전국으로 확산, 전국 320여개교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의 참여하였으며, 1462명이 퇴학, 3000여명이 퇴학 혹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되었다.

전국 지도 사진[전국으로 퍼져나간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적 가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작게는 광주전남 지역의 학생들이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작은 사건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작은 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바로 ‘시작’이라는 점이다. 1920년대 초부터 서서히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되어 11월 3일의 항일 시위가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학생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히 일본의 폭력에 대항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이 깨어나게 된 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으며, 광주에서 시작된 작은 물방울 하나가 전국으로 확산되어지고, 나아가 중국과 일본내에서도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게 되었다. 불의에 대항하고, 민족적 자긍심으로 일깨운 작은 물방울 하나가 큰 파도가 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시위대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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